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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 잭의 집> 살인마 잭은 왜 인간을 사냥했나

라스 폰 트리에가 지은 살인마 잭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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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승인 2020-02-18 [10:30]

[씨네리와인드노상원 리뷰어]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에서 예민함은 언제나 여성의 재능이었다. 여성은 남성이 감지하지 못한 것을 감지하고 비극의 징조 또한 더 빨리 알아차린다. 파국에 대한 기민한 반응은 감독의 파괴적인(내지는 자기파괴적) 성향과 이어지며 여성화자들을 비극의 중심에 위치시킨다. 더 많이 느끼기 때문에 더 크게 반응하고, 더 크게 반응하기 때문에 더 큰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따라서 그의 거의 모든 작품 속 주인공은 항상 여성이었다. 그런 그가 <살인마 잭의 집>에서는 20년 만에 처음으로 남성 화자를 데리고 나왔다. 이 영화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살인을 일종의 예술이라 믿는 살인마 잭은 감독 자신이고, 잭이 살해한 여성들의 시체는 본 트리에의 작품이며, 결국 영화 <살인마 잭의 집>은 라스 폰 트리에 감독 본인이 직접 나와서 그의 예술세계를 토 나올 정도로 자세하게 설명하는, 지난 수십 년간의 그의 작업에 대한 한 편의 주석이다.

 

칸 영화제 60주년 기념으로 특별 제작된 영화 <그들 각자의 영화관>은 칸이 사랑해온 거장 35인이 각각 만든 단편을 모아 하나의 장편으로 묶어낸 작품이다. 모든 단편의 공통된 테마는 영화관으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감독들 저마다의 영화관에 대한 개인적 의미, 개인적 추억 등을 담고 있어 꽤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영화에는 영화<살인마 잭의 집>의 원천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라스 폰 트리에의 단편 <그 남자의 직업>이 수록되어 있다. 해당 단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화관 옆자리에서 자꾸 말을 걸며 시끄럽게 구는 남자 때문에 주인공 라스 폰 트리에(본인이 직접 출연한다)는 매우 성가셔한다. 자신이 운영하는 가죽 사업에 대한 장광설이 끝난 후 시끄러운 남자는 대뜸 ‘그런데 당신 직업은 무엇이오?’라고 라스에게 질문하는데, 그러자 라스는 ’난 살인을 하오’라 답한 뒤 일어서서 민폐남의 머리를 망치로 두개골이 으깨질 때까지 때려서 죽인다. 엽기적인 살인행위가 끝난 뒤 그는 자리에 앉아서 시체를 옆에 두고 다시 영화에 집중한다. 이게 그 단편의 전부다. 그에게 영화관은 비유적인 의미에서나, 직접적인 의미에서나 스크린 위에 살인을 그려내는 장소다. 그가 작품 속 등장인물들을 학대에 가까울 정도로 가혹한 상황에 내던지는 작업의 반복에는 어쩐지 가학적일 뿐만 아니라 피학적인 면이 있으며, 자기 연민 적일 뿐만 아니라 자기혐오 적인 면이 있는데, 그 아이러니함에 <살인마 잭의 집>의 핵심이 있다.

 

▲ '살인마 잭의 집' 스틸컷.  © 씨네리와인드

 

희대의 연쇄 살인마 잭은 지옥으로 가는 길 위에서 안내자 버지에게 12년간 저지른 살인 중 5개의 사건을 골라 고백한다. 그러나 이것은 고해와는 거리가 멀다. 이것은 오히려 중증 나르시스트 살인마가 펼쳐 보이는 살인이라는 예술의 자랑스러운 전시이다. 잭은 온갖 궤변을 동원해 자신의 살인 행위를 예술로 포장하기 바쁘고 스스로 나름의 아티스트임을 자처한다. 그는 매번 살인을 저지를 때마다 자신이 정화됨을 느끼고, 평생을 따라다닌 지독한 강박증으로부터 잠시라도 심리적 자유를 얻을 수 있음을 발견해왔다. 처음에는 숨 쉴 구멍을 뚫기 위해 사람을 죽였을지 모르나, 어느새 그에게 인간사냥은 하나의 경건한 제의이자 예술이 되었다. 얼마나 잔혹하게, 얼마나 독창적이게 죽일까 하는 것이 그 예술의 방법론이다. 작업을 마친 시체는 사진을 찍어 둔 뒤 냉동고에 보관한다. 첫 번째 살인은 우연히 잭이 차에 태우게 된 여자를 잭(자동차 타이어를 갈 때 쓰는 도구)으로 얼굴을 내리쳐 죽였다(잭이 잭을 이용해 첫 번째 살인을 저지른다는 설정은 앞서 말했듯 잭이 감독의 페르소나라는 사실의 강력한 증거다.). 두 번째 살인은 죽은 남편의 보상금과 관련해 할 말이 있다며 과부의 집에 들어와 과부를 목 졸라 죽였다. 세 번째 살인은 데이트하던 여성과 여성의 두 아들을 외지로 소풍을 데려와 사냥총으로 죽였다. 네 번째 살인은 절름발이 행세를 하며 만나던 금발의 젊은 여인에게 심한 모욕을 주다가 칼로 죽였다. 참다못한 버지는 자네는 가장 약한 여성들만 골라 살해했다며 비난을 하고, 잭은 대부분의 경우 여성들이 더 좋은 예술의 재료라며, 그들은 예술 안에서 영생을 얻는 것이라며 응수한다. 그리고 자신은 남성도 분명히 죽이려 했다고 다섯 번째 살인을 들려준다. 한무리의 남성들을 일렬로 세워 두고 풀메탈 재킷 총알 한 방으로 모두의 머리를 관통 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살인은 완성되지 못했다. 경찰이 들이 닥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잭은 버지와 지옥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12년간에 걸쳐 그의 살인은 점점 더 대담해졌고, 정교해졌다. 그의 논리에 의하면, 점점 더 완벽에 가까운 작품이 완성되어간 것이다.

 

살인 행각들의 고백 중간중간 잭은 사실 어렸을 때부터 건축가가 되고 싶었다는 말을 한다. 사실 이 것은 그동안 언급한 끔찍한 살육의 기록들보다도 훨씬 더 내밀한 고백으로, 사실은 자신도 남들과 같은 재료로 ‘용인될 수 있는’ 예술을 해보고자 하는 소망이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버지의 “집을 짓는 다는 일 말일세, 그건 어찌되었나?” 라는 질문에 잭은 고개를 떨어트리며 “그건 잘 안 됐어요. 벽돌로도 노력해보았고, 나무로도 지어봤지만.” 이라 답한다. 이에 버지는 “그럼 자네만의 재료를 가지고 집을 지어보게” 라 말해주고 잭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다가 작업을 시작한다. 그렇게 그는 냉동고 안의 꽁꽁 언 시체들을 쇠줄로 엮어 시체로 만든 집을 완성한다. 시체로 만든 집. 영화는 글렌 굴드(영화의 러닝 타임 내내 글렌 굴드가 반복해서 언급되고 그의 연주는 배경음으로 깔린다)가 연주한 바흐의 파르티타를 들려주며 살인마 잭이 지은 집을 풀숏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라스 폰 트리에가 그동안 지어온 작품세계를 대변하는 강렬한 이미지다. 그 전체의 그림이 드러나는 순간 관객들은 잭/라스 폰 트리에가 그동안 해왔던 작업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는 그의 작품세계를 혐오하면서도 사랑한다. 그는 글렌 굴드 같이 대중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위대한 예술가를 동경하면서도 그런 예술가들과 자신 사이에 명확한 선을 그어 자신의 개성/구별적 자아를 확보한다. 그가 지은 집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며, 나무도 벽돌도 아닌 시체로 집을 지을 수밖에 없는-그러니까 잔혹한 폭력묘사와 성적 묘사를 통해 어둡고 암울한 영화들을 토해낼 수 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연민하면서도 채찍질하는 양가적 공간이다. 그는 실제로 우울증 치료요법의 일환으로 영화를 찍은 적도 있다(안티크라이스트, 2009). 이것이 잭과 폰 트리에의 방식이다. 그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모두가 나의 작품을 좋아한다면 나는 실패한 것이다.”

 

▲ '살인마 잭의 집' 스틸컷.  © 씨네리와인드

 

이 영화의 희생자들은 모두 7명이고, 그 중 6명은 여성들이다. 그동안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는작품 내에서 여성들이 겪는 잔혹한 일들 때문에 여성혐오 적이라는 비판을 숱하게 받아왔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의 영화는 여성혐오에 기반한 영화일까? 앞서 말한 라스 폰 트리에의 자기 연민을 동반한 자기 혐오의 아이러니는 그의 여성관과 무관하지 않다. 작품 속 감독 본인, 즉 남성들의 무지함과 둔한 상황 판단에 비해 여성들은 영리하고 사리에 밝다. 감독은 자신의 남성성을 낮추는 동시에 여성성의 뛰어난 점(포용력, 연민, 기민함)을 묘사하고, 여성들은 그 뛰어난 점으로 인해 오히려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는다. 언뜻 보면 뛰어난 여성주체가 입는 피해를 관찰함으로써 남성가해자들의 male gaze를 비판하는 듯 보이지만, 여기에 남성 감독의 자기연민이 덧씌워지며 실제로 작품자체가 여성을 파괴하는 것과 대상화라는 문제가 남는다. 그는 어디까지나 여성성을 무대위에 올려놓음으로써 고찰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대의 주변부는 단상위의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들의 시선(작품 외적인 male gaze)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니까 그의 영화에서 여성들은 ‘대상화된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언제나 관객에게 의도적으로 혐오감을 불러일으켜 한계선을 더듬는데 주력해왔다. 대부분의 여타 영화들이 묘사를 괄호 치거나 고개를 돌려 슬쩍 피해 가던 금기의 영역까지 성큼성큼 들어가 카메라를 들이대고, 대상을 그려내는 방식에서(특히 여성에 대한) 아슬아슬한 도덕적 줄타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 폰 트리에의 작업의 핵심은 이런 아슬아슬함에 있다. 좋은 예술이 수행할 수 있는 최대의 기능 중 하나는 작품이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경계선들을 끊임없이 문지르며 이것이 유성매직이 아니라 연필로 그어진, 언제든지 후퇴하거나 희미해질 수 있는 가변적인 것임을 밝히는 것이라고 본다. 끊임없이 우리가 절대적이고 고정 불변하다 생각했던 도덕적 전제들을 뒤흔들고 논의를 촉발시킨다. 그러한 작업을 오랜 세월 동안 꾸준히 반복해온 감독은 많지 않고, 라스 폰 트리에는 분명히 그 중 하나다. 때문에 그의 작업은 옳든 그르든, 추하든 아름답든,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매혹적일 수밖에 없다.

 

영화의 결말부 잭은 지옥을 벗어나 지상으로 올라갈 기회를 노리다 발을 헛디뎌 지옥의 가장 깊은 밑바닥으로 추락한다. 그렇게 라스 폰 트리에는 스스로에 대한 채찍질로 영화를 끝마친다.

 

 

보도자료 및 제보cinerewind@cinerewin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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