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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관녀(棺女)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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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승인 2020-04-17 [16:54]

난 지금 이 아가씨와 눈싸움 중이다.

 

벌써 며칠 째 우리 두 사람은 고양이와 강아지처럼 눈만 마주봐도 거칠게 숨을 내쉰다.

 

의견 차이라면 다듬으면 되고 잘못을 저질렀으면 사과하면 그만이다.

 

서로 다른 평행선을 걷는 한 어느 한 쪽이 굽히지 않고서야 점을 찍을 수 없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서로 눈을 부라리며 지겹게 했던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은실 : 솔직하게 말할게요. 뭐, 여태까지 했던 말도 다 진심이었지만 그쪽한테는 더 강력한 충격요법이 필요할 거 같네요. 내가 나이는 어려도 이 바닥에서만 8년이에요, 8년. 아르바이트 기간을 합치면 10년이 넘고요. 그쪽은 내가 꼼꼼히 안 본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큰 착각입니다. 그렇게 볼 가치가 없으니까 안 보는 거라고요.
진석 : 가, 가치, 뭐요?
은실 : 가치가 없다고요, 가치가. 뭐, 그쪽 입장도 이해해요. 시간 날 때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겠죠. 밤에도 잠 못 들다가 컴퓨터 앞에 서는 날이 많았을 거고요. 밥 먹다가도 스마트폰 켜서 메모했겠죠. 그렇게 차곡차곡 모으고 또 모아서 비장의 무기다! 하고 딱 내밀었는데 내 반응이 시큰둥하니 내 찾을 하는 거겠죠. 자기가 못썼다고 생각하면 너무 비참하잖아요. 당신 작품은 캐릭터가 한결 같아요. 다 그쪽 같다고요. 진석1, 진석2, 진석3이 서로 대화하는 기분이라고요, 알아요? 여자도 다 당신 같아.
진석 : 그야 그쪽이 날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독자들이 보면 다를 거고...
은실 : 아, 캐릭터가 다 똑같다고요. 생각하는 게 전부 한결 같으니 예상을 빗나가지 않아. 그리고 트릭도 너무 단순해요. 요즘 애들 ‘명탐정 코난’ 세대입니다. 이런 어설픈 트릭으로는 감동을 주지 못한다고요. 그리고 전개도 추리소설 몇 개 가져다 섞은 거잖아요. 내가 이 정도도 못 찾을 줄 알았어요?
진석 : 뭐, 뭘 섞었다고 그래?
은실 : 하, 내가 하나하나 지목해 줄까요? 어설프게 속이려고 하지 마세요. 뭐, 섞어서 재밌으면 좋아요. 그런데 재미가 없어요. 줄거리만 봐도 흥미가 떨어지고 글은 너무 단조롭고 캐릭터가 다 같다 보니 충돌하는 맛도 없고. 무엇보다 장편을 쓸 수 있는 필력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진석 : 아니, 이게 중반을 넘어가면 과거가 공개되거든요. 그러면 인물들끼리 더 엮어서 재미가 확 살아나는...
은실 : 그리고요, 인물도 너무 많아요. 복잡해요. 장편을 이끌 자신이 없으니까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려고 여러 캐릭터를 설정한 거 같은데 여기 등장하는 12명 중 독자들이 관심을 지닐 만한 인물이 한 명도 없어요.

 

위에 선 사람이 자기를 보호하는 방법은 한결 같다.

 

넌 무능하다.

 

네가 쓴 작품은 읽을 가치가 없다.

 

쓰레기인 너에게 이런 일이라도 맡긴 걸 영광으로 알아라.

 

진석 : 그래요, 알겠어요. 알겠는데 그러면 제 글에 이것저것 아이디어라도 붙여줘서 연재가 가능한 작품으로 만들어 줘야지, 전 언제까지 원고 교정만 해야 되는 겁니까. 분명 면접 볼 때에는 제 작품도 연재할 수 있게 해준다고 그러지 않았나요?
은실 : 아항, 지금 내가 면접 때 거짓말을 했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구나. 그때 했던 말 다시 한 번 정확하게 해줄까요? 네, 저희 회사에서도 충분히 연재가 가능하죠. 책도 낸 작가님이라고 하시니 기준은 충분히 통과가 될 테고, 어떤 작품일지 기대가 되네요. 그런데 알고 보니, 맙소사! 자가 출판 해놓고 작가라고 당당하게 소개할 줄이야! 오히려 취업사기 친 그쪽을 데려가 주는 우리한테 고마워해야 되는 거 아닌가. 적어도 교정 일이라도 주니까.
진석 : 그게 그냥 자가 출판한 책이 아니라 블로그에 연재했을 때 반응이 좋았다니까요. 그리고 내가 대학 신춘문예 최종 후보에도 들어가...
은실 : 그 블로그 들어가 봤는데 하트만 많고 댓글은 없던데요? 그게 무슨 관심이야. 이웃이니까 눌러준 거지. 내가 장담하는데 그 사람들 보지도 않고 하트 누른 게 뻔해요. 그리고 대학 신춘문예. 나 참, 신춘문예 당선된 날고 긴다는 작가들도 성공하기 힘든 게 출판업계인데 무슨 대학 신춘문예 최종후보가지고 떵떵거리세요.
진석 : 하, 좋아요. 그러면 내 작품은 절대 연재 안 해주겠다는 소리네요?
은실 : 또, 또! 또 이렇게 왜곡한다.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요. 좋은 기획안과 작품을 가져오면 연재 당연히 해주죠. 지금 해줄 수 있는 말은 더 열심히 노력하라는 말밖에 없네요. 자, 이제 더 시간 낭비하기 싫으니 일어날까요?

 

또 내뺀다, 또.

 

몇 번이고 보았다.

 

내 원고를 대충 한 번 보고는 책상 옆에 대충 처박아둔걸.

 

한 번은 커피를 흘려서 읽지도 않은 원고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매번 따질 때마다 같은 피드백을 준다.

 

한결 같은 결론과 함께.

 

이럴 때 의지할 사람이 효림이 밖에 없다는 건 축복이자 고통이다.

 

잠시라도 공허한 마음을 채울 수 있다는 건 축복, 섹스 말고는 즐거움이 없다는 건 고통.

 

새하얀 등에 선처럼 그어진 새빨간 브래지어 끈이 욕구를 자극한다.

 

효림 : 그 여자 웃긴다.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진석 : 내가 작가였어 봐. 제대로 읽지 않아도 다 좋다고 했을 걸. 처음에는 작가 선생님하면서 빌빌거리더니 자가 출판이라는 거 알고 태도가 싹 바뀌었다니까. 교정은 그냥 아르바이트생 써도 되는 건데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니.
효림 : 그냥 나오는 게 좋지 않아? 아니면 공모전에 더 도전해 보거나.
진석 : 그러고야 싶지. 그러고야 싶은데, 여기가 업계 탑이고 기회만 생기면 무조건 뜰 수 있으니까. 연재만 올라가면 독자층이 보장되니까 내 입장에서는 포기하기 싫은 거지.
효림 : 그런데 이건 기회가 아니잖아. 이러다 몇 년 동안 교정 업무만 하면 어쩌려고.
진석 : 그니까. 그래서 내 마음 속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매일 싸워. 범죄 추리 소설을 연재하는 작가는 한 명 뿐이니까 그 사람만 사라지면 내 자리가 보장될 거 같기는 한데.
효림 : 새로운 사람을 뽑을 수도 있는 거 아냐?
진석 : 아니, 그러지는 않을 거야. 전에 이야기 들어보니까 내부 직원한테 먼저 기회가 돌아가는 거 같더라고. 난 연재만 시작되면 자신이 있어. 내 이야기에 모두 빠져들게 만들 준비가 되어 있는데 기회가 오질 않네.
효림 : 너무 걱정하지 마. 오빠 아직 젊잖아. 글이란 게 나이가 들수록 더 좋아지는 거고. 오빠는 아이디어가 많으니까 하나만 터지면 계속 써나갈 수 있잖아. 안 그래?

 

그래, 아직 젊지.

 

예전에도 젊었고 지금도 젊고 앞으로도 젊을 거고.

 

이 끝나지 않을 거 같은 여름이 햇빛을 잃는 순간 암흑의 구렁텅이로 푹 빠져버리겠지.

 

그게 두려워서 견딜 수 없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데 조그마한 손은 힘없이 나가떨어진다.

 

희망을 잡지 못하는 두 손은 거칠게 가슴을 움켜쥔다.

 

입을 맞추고 서로의 몸을 애무하고 침대 위에서 몸을 포갠다.

 

진석 :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40살까지 작가로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
효림 : 끝까지 완주해서 꼴등을 하는 건 오빠 자유야. 오빠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만족해야 되는 거야.
진석 : 지금 내가 그렇구나. 한참 뒤쳐져 있는 거구나.
효림 : 어쩔 수 없잖아. 출발 신호를 늦게 들었다고 변명해 봐야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으니.
진석 : 맞아. 부정출발을 했다고 해도 남들이 못본 체 하면 끝이지. 운 좋게 지름길을 발견한 경우도 그렇고.
효림 : 또 그 사람 이야기구나.
진석 : 미안. 나도 지겨운 거 알아. 그런데 자꾸 또 하게 되는 걸. 만약 그런 살인사건이 내 주변에 일어났다면 어땠을까. 경찰도 해결하지 못하는 그런 사건이 발생하고 그 증거를 내가 찾고 진범도 밝혀냈다면, 그리고 그 사건을 글로 쓰게 됐다면 지금쯤 유명한 작가가 되어있지 않을까.
효림 : 그러면 너무 슬프잖아.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거잖아. 그 사람 남편이랑 남동생이 죽었어. 그런 끔찍한 고통을 겪을 바에야 평범하게 살아가는 게 행복하다고 생각해.
진석 : 고통은 잠시고 명예와 영광은 영원이야. 지금 그 아줌마가 남편이랑 남동생을 생각할까. 그 촌구석에서 살았어봐. 지금처럼 호화로운 삶은 생각도 못했겠지.
효림 : 서울에 살면 호화로운 거야? 그 작품 이후로 히트 친 것도 없잖아.
진석 : 그니까. 그런 능력 없는 사람이 운이 좋아서 자리를 차지한 거야. 그리고 그 나이 먹을 때까지 내 앞길을 막고 있는 거라고.
효림 : 이제 그 생각은 그만 좀 하고. 계속 생각해 봐야 오빠만 피곤해져. 지금 오빠 스스로 자기 자존감 낮추기 싫으니까 다른 사람 비하하고 있잖아. 누구에게나 기회는 와. 오빠한테도 올 거고. 그때 잡으면 되는 거야. 너무 마음 쓰지 마.
진석 : 모르겠다. 제발 그 기회라는 게 왔으면 좋겠다. 지금이 너무 힘들다.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했다.

 

효림이의 숨소리를 들으며 나를 향해 조소를 짓던 그 땅딸막한 마녀의 표정을 계속 생각했다.

 

정말 재능이 없다면 이미 돌아가기 늦은 건 아닐까.

 

지름길을 찾지 못한다면 완주할 용기를 잃고 길 한 가운데에서 미아가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누군가에게 길잡이 역할만 해주다 그림자 안으로 사라지는 게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블로그 이웃 중 책을 낸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책 홍보를 부탁했고 정성스레 후기를 써줬다.

 

내 후기를 보고 자기에게 관심을 가진 호텔이 작업실을 빌려줬다는 댓글이 달렸다.

 

너무 감사하다는 그 글에 실소가 터졌다.

 

넌 지금 뭐하고 있는 거니.

 

네 글은 아무도 잃지 않아.

 

네가 소개해 주는 다른 글을 읽을 뿐이라고.

 

넌 방금 경쟁자 한 사람을 끌어당겨 준 거야.

 

디딤돌 역할만 하다 점점 크기가 줄어들어 작은 돌멩이가 되겠지.

 

그때는 아무도 널 찾아주지 않아.

 

학교 근처 순대국밥 집에 들어갔다.

 

효림이는 빨리 나오면서 배를 든든하게 채울 수 있는 음식을 원했다며 미소를 보이지만 밤을 꼴딱 새서 그런지 속이 좋지 않다.

 

숟가락으로 순대를 휘휘 젓던 중 가게 좌측 천장 쪽에 붙은 벽걸이 TV가 눈에 들어왔다.

 

YTN에 채널이 맞춰져 있는 화면에는 속보가 하나 들어왔다.

 

‘물꽃마을 연쇄 살인사건 범인 무죄 가능성... 35년 만에 진범 바뀌나’

 

식당 종업원에게 리모컨을 받아 볼륨을 높인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명확한 신호를 보내듯 귓가를 때린다.

 

“과거사건조사위가 당시 핵심증거였던 머리핀에서 범인의 DNA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을 알리면서 당시 범인으로 검거되었던 오세근에 대한 수사 결과가 논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35년 전 20명을 살해한 이 연쇄살인사건은 소설 ‘자전거를 탄 살인마’를 통해 전국적으로 알려졌는데요, 소설을 쓴 작가 김숙자 씨가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하면서 화제가 된 바 있습니다.”

그래, 이거야.

 

이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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