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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다시읽기| 이제는 가난마저 훔쳐가는구나

박완서 '도둑맞은 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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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승인 2020-04-30 [12:40]

▲ '도둑맞은 가난' 표지  © 문어당

 

[씨네리와인드|김준모 기자] 한 대학교수가 SNS에 이런 글을 남긴 적이 있다.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자’ 그는 현대인들이 너무 많은 소비와 낭비를 한다는 측면에서 자신부터 먹는 것을 줄이겠다는 취지로 이와 같은 글을 올렸다. 그의 글과 의도에는 어떠한 비난의 측면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인에게 필요 이상의 과소비는 재화의 낭비와 건강 악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난’이라는 단어는 어딘지 모르게 어감이 좋지 않다.

 

물론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는 인물이 있을 수 있다. 배수아 작가의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에 등장하는 노용이란 인물은 자발적 가난을 실천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남는 음식을 자신의 집 앞 상자에 놔 달라고 말한다. 일을 하는 게 오직 먹고 살기 위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라면 반대로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 일을 할 필요가 없다. 노용은 자발적으로 부를 모으지 않고 가난을 실천한다.

 

하지만 어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가난이 선택의 문제겠는가. 2010년 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원이었던 차명진은 참여연대가 주최한 최저생계비 체험 수기에서 최저생계비를 통해 해결한 식사를 가리켜 ‘이 정도면 황제의 식사가 부럽지 않지요’라는 표현을 써 논란이 됐다. 그는 적은 금액으로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다는 걸 자랑하고 싶었지만 최저생계비는 가난의 상징이다. 이를 황제란 표현과 함께 사용했다는 점이 논란의 이유였다.

 

그렇다면 가난은 또 다른 성역인 것일까. 가난하지 않은 사람은 가난을 논할 수 없고 건드려서도 안 되는 걸까. 가난은 성역이 아닌 혐오의 영역일 것이다. 우리가 영화 ‘기생충’을 보았을 때 반지하 그보다 더 깊은 지하에서 느낀 감정은 두려움과 더러움이다. 반지하를 본 적 없는 이들에게 주인공 기택 가족이 사는 반지하는 저택 안에 숨겨진 지하만큼이나 큰 충격을 준다. 그만큼 가난은 누구에게나 피하고 싶고 바라보고 싶지 않은 영역이다.

 

그런 혐오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가난의 영역을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그 영역에 절대 떨어질 일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박완서 작가의 ‘도둑맞은 가난’은 부잣집 도련님 상훈이 정체를 속이고 멕기 공장에 다니며 미싱을 돌리는 ‘나’와 같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다. ‘나’는 지독한 가난으로 가족을 다 읽어버렸다. 그녀는 상훈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그를 집으로 들인다.

 

‘나’의 가족사는 그녀가 느끼는 가난의 염증을 강하게 보여준다. 아버지가 실직한 후 어머니는 퇴직금을 불리기보다는 그 돈으로 아버지에게 사업을 시킨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오빠는 그들에게 닥친 가난의 두려움 때문에 자살을 택한다. 하지만 ‘나’는 가난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한다. 그녀마저 삶을 포기한다면 그건 가난에 굴복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열심히 돈을 모으던 그녀는 상훈이 폐병쟁이의 조의금으로 자신의 전 재산 절반을 냈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딱히 폐병쟁이에게 동정을 품는 거처럼 보이지 않았던 상훈의 행동에 의문을 품던 ‘나’는 드디어 그 비밀을 알게 된다. 상훈은 그녀에게 자신은 사실 부잣집 도련님이며 유별난 아버지에 의해 가난을 ‘체험’하고자 멕기 공장에 다녔음을 고백한다. 그 고백의 순간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재화와 서비스에는 그 한계가 있다. 부유한 이들이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누릴수록 가난한 이들은 이를 누릴 수 없다.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군가가 부자가 된다는 건 다른 누군가는 빈곤하게 살아야 된다는 걸 의미한다. 때문에 상훈과 ‘나’는 반대의 위치에 설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헌데 상훈이 가난을 얻기 위해 ‘나’의 영역에 들어온 순간 그녀는 절망한다. 절대 부자가 훔치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가난이란 혐오까지 그들은 훔치려 드는 것이다.

 

작품 속 상훈에게 가난이란 극기훈련 쯤으로 여겨진다. 육체적으로 힘들어서 가고 싶지 않지만 짧은 순간이 지나면 다시 따뜻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런 체험 말이다. 상훈의 아버지는 상훈이 가난을 체험하게 함으로 두 가지 중 하나의 생각을 지니게 만들었을 것이다. 첫 번째는 가난에 대한 혐오다. 가난을 혐오하게 되면 절대 가난으로 가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앞서 설명한 노용 같은 자발적 가난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얕보는 시선이다. 정치인들이 서민 체험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나도 이런 걸 경험해봤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누군가에게 일상이고 빠져나오고 싶은 지옥을 그들은 체험으로 여기고 ‘나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긴다. 상훈은 가난을 체험하면서 ‘나도 가난을 경험한 적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그가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척’ 할 수 있으며 얕볼 수 있는 얄팍한 무기다.

 

가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가난이나 고난을 컨셉 삼는 연예인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가난도 성공을 위한 컨셉이며 인기를 끌기 위한 요소다. 누군가에게는 빠져나오고 싶은 지옥이자 절망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성공을 위한 키워드로 작용하는 것이다. 하다하다 가난까지 빼앗기는 모습을 담아낸 ‘도둑맞은 가난’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혐오와 공포의 대상인 가난도 가치를 지닌다는 아이러니를 상기시킨다.

 

▲ 작가 박완서  © 위키백과



김준모 기자| rlqpsfkxm@cinerewin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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