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여성에게 형광펜을 긋다, ‘히든 피겨스’

언제나, 어디에나 여성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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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지
기사입력 2019-04-22 [10:55]

 

▲ 스타빌로 광고     © 스타빌로



 

  2018년 칸 라이언즈 광고에서 수상을 한 독일 형광펜 스타빌로의 광고. 나사의 풍경을 담은 흑백사진 속에서 오른쪽 구석에 있는 흑인 여성에게 형광펜을 칠해 표시하고 있다. 이 여성의 이름은 캐서린 존슨. 나사에서 일했던 흑인 여성 수학자다. 아폴로 11호의 지구 귀환에 아주 중요한 수학 공식을 발견했지만, 흑인이고 여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큰 주목을 받지 못 했었다.

 

 히든 피겨스는 인류의 가장 위대하고 기념비적인 업적, 아폴로 11호의 발사와 귀환에서 가려져있던 여성들을 조명하고 있다. 차별 받고 고통 받던 인물들이 고난과 역경을 뚫고 결국 성공하는 에피소드를 보여주는 것은 히어로 무비, 혹은 감동적인 실화를 다룬 드라마나 휴먼 장르에서 흔하게 보이는 스토리텔링이다. 히든 피겨스는 그런 영화들의 공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지만, 여태까지와는 다른 인물들을 비추면서 다른 영화들과 차별점을 둔다.

 

 

▲ 히든 피겨스 스틸컷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기존의 영웅 서사식 영화에서 주목을 받았던 것은 항상 남성이었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가 다루는 것은 대부분 영웅적인 행동을 한 남성, 그리고 백인이다. 히든 피겨스는 그와 다른 인물들을 조명하면서 영화에 차별성을 부여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백인이 아닌, 남성이 아닌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만으로도 영화가 새로워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히어로 서사의 공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지만 ‘흑인 히어로’라는 것만으로도 주목을 받은 블랙 팬서처럼 말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캐서린 존슨은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 흑인으로서 겪는 차별 두 개의 차별을 이중적으로 받고 있다. 영화는 주로 흑인이기 때문에 겪는 차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여성으로 겪는 차별이 그 안에 내재되어 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포기하고 참고 견뎌야 하는 주변의 압박과 면박들. 영화는 이 모든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서 이 중첩된 차별을 보여주기 위해 상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장치가 바로 ‘화장실’이다. 캐서린은 화장실을 가고 싶을 때마다 ‘흑인 여성 화장실’이 있는 다른 건물까지 달려가야만 한다. 나사의 건물에는 백인 여성이 사용 가능한 ‘여성 화장실’만 있기 때문이다. 백인의 화장실에 들어갔던 캐서린은 그 화장실을 이용하던 백인 여성으로부터 면박을 받는다. 남녀 차별이 만연하던 시기, 차별을 받는 여성 내부에서도 또다시 백인과 흑인이라는 위계가 존재하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실제로 백인과 흑인의 시설이 구분되어 있고, 흑인이 사용이나 출입이 불가한 건물이 있었던 것은 당시 미국의 현실이다. 흑인 인권 운동의 시발점이 된 로자 팍스 사건 또한, 로자 팍스가 흑인 전용 자리에 앉지 않은 채 백인 남성에게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기 때문에 시작된 사건이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 욕구인 배설의 욕구를 캐서린은 흑인이기 때문에 당장 해결하지 못 하고 참아야만 한다. 또한 공간의 제약이 있다는 것은, 흑인이기 때문에 ‘이동의 자유’ 가 제약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건물 안에 있는 화장실은 ‘백인 여성 전용 화장실’이 아니라 그냥 ‘여성 화장실’인 것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그냥 여성’은 백인이라는 인식, ‘보통의 인간 여성’은 백인이라는 인식을 기반으로 별도의 표기 없는 여성 화장실은 백인 화장실이 된 것이다. 그에 비해 ‘흑인’은 특이한 존재이기 때문에 별도로 표기되어 백인과는 다른 공간을 이용해야 했다. 업무 능력에 지장을 줄 수도 있는 생리적 욕구조차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은 당시의 흑인 차별이 얼마나 뿌리 깊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본능적인 욕구조차, 인간의 기준과 어리석은 편견이 만들어낸 ‘인종’이라는 경계를 해체하지 못 한 것이다.

 

 결국 모든 편견과 압박을 극복하고 캐서린은 나사 내부에서 흑인 여성 과학자로서 위치를 공고히 하게 되고 아폴로 11호의 귀환에 핵심적인 수학 공식을 도출해낸다. 물론 이 성공이 온전히 그녀의 노력 덕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가장 상징적인 화장실 문제는 그녀의 백인 상사 덕분에 해결됐다. 오로지 성공과 효율만이 중요한 백인 상사는, 캐서린이 화장실 문제 때문에 업무에 집중하지 못 하는 것을 알고 나사 내부의 여성 화장실을 모든 여성이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로 만든다. 이는 캐서린 개인의 노력 부족이나 영화의 성찰이 부족한 지점이라기 보다는 시대적 한계라고 볼 수 있다. 캐서린은 분명 뛰어난 사람이지만, 겹겹이 쌓인 차별을 격파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특히나 당시 사회의 주류였던 백인 남성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백인 남성의 도움을 받았다고 해서 캐서린이 한 노력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용감하고, 똑똑하고, 차별에 맞서 자신의 꿈을 쫓아간 사람이다. 캐서린, 그리고 동료들의 발자취는 후세에 길이 남을 역사적인 흔적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인종차별과 남녀차별이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사회가 아주 느리더라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더 많은 캐서린을 위해, 화장실이 아니더라도 어떤 사소한 차별도 받지 않을 수많은 여성 과학자들을 위해, 그리고 나아가 흑인 여성들, 여성들, 흑인들, 모든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히든 피겨스는 등대처럼 서서 불빛을 비추어주고 있다.

 

[씨네리와인드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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