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 번째 살인' 포스터 © 티캐스트 |
[씨네리와인드|임다연 리뷰어] 영화 속 살생 뒤에는 언제나 다른 생명의 ‘가능성’이 열린다. 다섯 마리의 카나리아가 죽고 한 마리가 살아남았고, 아버지의 죽음으로 딸은 강간에서 해방되었으며, 식품 공장의 비리는 수면 위로 드러났다. 이 ‘가능성’은 나아가 타인에 대한 이해에 대한 가능성까지 끄집어 낸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가능성’이라는 단어에는 빈 자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빈자리에 개인들은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다. 변호사 시게모리는 부녀 관계를 투사하고, 피해자 사키에는 자신을 강간하는 아버지를 집어넣는다. 이 때 ‘가능성’은 더 이상 객관적인 ‘진실’과는 무관해진다. 오히려 희망과 믿음에 더 가까워지지만, 인물들은 자신들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진실’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영화는 마지막에 와서 다시금 ‘진실’의 베일을 벗겨낸다. 사형이라는 닫힌 결말을 마주한 채로 다시 열린 가능성은 이제 관객들을 향한다. 닿은 줄 알았던 이해와 진실은 애초에 그곳에 있는 것이었을까?
영화에서 유의미하게 여겨지는 ‘진실’은 ‘이해’에 기반한다. 이 ‘진실’은 재판장의 진실과는 구분이 되는 개념인데, 재판장의 진실은 이들이 말하는 ‘소송경제’와 개개인의 이해 관계에 기반하는 개념이다. 유의미한 ‘진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접견실에 존재한다. 접견실에서 이루어지는 증언은 법정의 그것과는 다르게 적나라한 이해관계보다 개인의 욕구가 우선된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 두 장소의 이해관계와 욕구는 일치하기 때문에, 이전까지 시게모리는 구분된 ‘진실’의 존재조차 알지 못한 채로 의뢰인의 이득만을 추구했다. 그러나 미스미는 감형이나 무죄 판결보다는 ‘이해와 공감’에 욕구가 있는 인물이다. 영화는 시게모리가 이런 미스미에게 공통된 지점을 발견하면서 비로소 시작된다.
![]() ▲ '세 번째 살인' 스틸컷 © 티캐스트 |
주요 등장인물 세명은 서로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이것은 부녀 관계와 관련이 된 것이기도 하고, 어떤 문제에 대한 외면과도 연관이 있다. 먼저 세 인물은 모두 비정상적인 부녀 관계를 가진다. 시게모리는 가족보다 일을 우선시하는 인물로, 딸은 그런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종종 사고를 친다. 사키에의 아버지는 사키에를 강간한 인물로 그려지고, 위장 식품을 판 부당한 돈으로 가족을 부양하기도 했다. 미스미 역시 첫번째 살인 이후 딸과 연을 끊었으며, 그의 딸은 미스미를 피하며 차라리 그의 죽음을 바란다. 이처럼 이들의 부녀 관계는 일면 가해자와 부당한 피해자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인물들은 모두 어떠한 지점을 외면하고 있다. 시게모리와 미스미는 가해-피해 구조의 부녀 관계를 외면하고 있다. 시게모리는 딸의 외로움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딸에게 먼저 전화를 걸지 않고, 미스미는 딸과 자신 사이의 문제를 방치한다. 사키에는 가족의 기반이 되었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강간과 불법 행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인물들은 이러한 공통점으로 엮여 마치 서로에게 공감하고, 각자를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들은 각자가 느낀 ‘이해’에 기반해 자신의 ‘진실’을 믿는다.
이처럼 마찬가지의 아버지 자리에 있는 시게모리는 사키에를 매개로 미스미에게 공감하고, 몰입한다. 그래서 사키에를 대하는 그의 모습은 자신의 딸을 대할 때보다도 어쩌면 더욱 아버지 같다. 시게모리는 이 공감을 기반으로 살인 동기에 대한 ‘진실’을 만든다. 그것은 심판이다. 시게모리가 심판으로 ‘진실’을 정하고 미스미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더 이상 외면하지 않겠다던 사키에의 입은 다시 막힌다. 그러나 시게모리는 미스미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이 두 인물이 구조적으로 같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고, 시게모리가 만든 ‘진실’의 기반은 이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 구조에서 딸려오는 구원은 가해자의 구원일 수 밖에 없다. 몰입에서 비롯된 그의 상상 속에서 그는 미스미가 된다. 사키에는 그런 자신을 올려다보고, 재판장에 나와 모닥불 같이 붉은 해를 받은 시게모리는 피를 닦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러나 몰입과 동질감에서 비롯된 이해와 공감은 필연적으로 불가능하다. 닮았다고 해서 같은 것은 아닌 것처럼, 이들이 느낀 ‘이해’는 그들이 각자 다른 개인이라는 점을 결여하고 있다.
![]() ▲ '세 번째 살인' 스틸컷 © 티캐스트 |
유대는 ‘접촉’으로 형상화 된다. 미스미가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방식은 손을 맞잡는 접촉이고, 절박해진 시게모리는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유리벽에 손을 댄다. 그러나 이들의 ‘접촉’은 상이한 의미를 가진다. 미스미는 접촉을 통한 이해와 공감, 그것에서 비롯된 믿음을 욕망한다. 그래서 그는 시게모리가 자신을 믿고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한다. 그가 증언을 번복하는 이유 또한 이것과 연관되어 있다. 증언을 바꾸는 것은 마치 시게모리를 시험하는 형태를 띄고 있다. 종내에는 믿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은 그가 하는 ‘증언’의 원래 의미와 완전히 상반되어 있다. 믿음을 호소하기 위한 것이 증언인데, 믿음이 선행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증언조차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무엇보다 ‘믿음’에 우선적으로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시게모리가 자신을 믿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시게모리의 손을 잡는다. 그러나 믿음에 대한 질문의 시게모리의 대답은 ‘알았다’였다. 영화에서 줄곧 시게모리는 마치 직업병과 같은 그의 성격을 드러낸다. 그가 하는 질문들은 이미 정한 답 안에 머무른다. 일어난 일을 이해하고 파악하려고 하기보다 확인을 받는 질문이 대부분이다. 애초에 시게모리는 스스로를 ‘장님과 코끼리’에서 코끼리가 무엇인지 알아내려는 ‘장님’을 맡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시게모리의 ‘접촉’은 단일한 답을 얻고, 그가 원하는 진실을 규명하고자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미스미의 이야기를 그는 ‘알았다’는 대답으로, 공통점에 기반하여 자신이 구축한 ‘진실’의 틀에 맞기 때문에 수용한 것이다.
이들의 불협화음은 빛과 그림자로 보다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영화에서 종종 시게모리는 손을 들어 빛을 어루만진다. 하지만 그가 온전한 빛을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문데, 어쩌다 내리쬐는 햇빛 속에 있더라도 이내 손을 들어 스스로 그림자를 만든다. 이처럼 그는 영화에서 어두운 색감의 옷을 입고, 화면의 어두운 부분에 위치하며, 그가 나오는 대부분의 야외 장면은 흐린 날씨이다. 이에 반해 미스미는 시게모리가 어루만지는 빛으로 형상화 된다. 접견실에서도 미스미는 빛이 들어오는 방향에 앉아있고, 같은 빛에 눈을 찡그리는 시게모리에 반해 미스미는 빛을 올려다본다. 빛과 그림자는 형체가 없기 때문에, 마치 미스미와 시게모리처럼 닿을 수는 있어도 만지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들이 서로를 이해했다고 생각했을 때 빛은 미스미의 손에, 그림자는 미스미의 얼굴에 드리워지지만, 결국 온전한 ‘접촉’은 불가능한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는 시게모리의 얼굴에 다시금 빛이 드리우지만, 이내 구름이 지고 그는 다시 어둠 속에 남는다.
![]() ▲ '세 번째 살인' 포스터 © 티캐스트 |
이들은 명백히 닮았다. 카메라 역시 착각을 위해 움직인다. 둘은 같은 구도로 접견실에 들어오고, 카메라가 옷을 보여주기 전까지 관객은 앉은 것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이 같지 않다는 것은 이제 누구보다 잘 안다. 이들은 2시간에 걸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서로에게 온전히 닿아 있었던 적이 몇 번이나 되었을까? 이들은 유리벽에 갇힌 채로 소통하고, 유리벽에 비춰진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가깝다.
그럼에도 여전히 미스미는 재판의 판결이 나고 한 마리의 새를 풀어 날리는 동작을 한다. 그것은 다시 가능성이다. 그에겐 이해의 실현이라는 가능성이었을지 몰라도, 그것을 보는 관객에게는 다른 가능성을 열어준다. 120분이라는 시간 동안 영화에 나온 살인 사건은 모두 명확한 진상 규명이 없다. 이해 관계 속에서 진실 없이 ‘진실’을 논하고 있는 이 영화의 제목인 ‘세 번째 살인’은 그 때문에 그 주어가 모호하다. 미스미가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세 번째 살인’이 완성된 것인지, 아니면 법조계로 나타나는 원리에 의해서 진실도 ‘진실’도 없이 살해 당한 ‘세 번째 살인’인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진실’은 언제나 개인의 것이고, 그마저도 입이 막혀 말할 수 없다. 외면하고 있던 실마리들을 앞으로 끌어와 카메라에 들이대고, ‘진실’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 영화는 그 자체로 가능성이다. 2시간 동안 이 가능성을 목격한 관객은 시게모리와 마찬가지로, 빛은 아닐지라도 새가 날아간 하늘을 바라본다. 목격한 ‘진실’로 무엇을 하고 생각할 것인지는 관객에게 달렸다. 가능성은 또 다른 가능성을 낳고, 수많은 여지를 만들어 주고서 영화는 마무리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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