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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관녀(棺女)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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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승인 2020-05-08 [17:03]

그 아가씨는 도시에서 왔다.

 

진하게 화장한 얼굴은 만화에서나 볼 법한 생김새였고 가느다란 팔목은 쥐고 흔들기만 해도 부러질 거 같았다.

 

주름치마에 높은 하이힐, 조그마한 얼굴을 스카프로 칭칭 감은 그녀는 집을 구하지 않고 여관에 묵었다.

 

마치 조만간 떠나갈 사람처럼.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왜 이곳에 왔는지 알았다.

 

빚을 진 게 분명하다.

 

아니면 이런 후미진 시골까지 올 이유가 없다.

 

예상대로 그녀는 다방에서 일을 시작했다.

 

쌀쌀맞고 무뚝뚝한 성격과 성을 절대 알려주지 않는 고집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그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았다.

 

한 사람, 소일거리를 도우며 중심지와 멀리 떨어진 외딴 집에 사는 청년을 제외하고는.

 

효림 : 당시 여관 주인 아들과 다방 여종업원한테서 들은 건데 연희는 서울에서 물꽃 마을로 팔려온 거래. 서울에서 지낼 때 남자 때문에 빚을 많이 졌다나 봐.

진석 : 그건 숙자 아줌마 책만 봐도 알 수 있잖아. 다들 그랬을 거라고 추측했다고.

효림 : 그치. 근데 이상한 게 오세근이 잡힌 뒤에 마을을 떠났다는 거야.

진석 : 그러고 보니 소설에는 연희에 대한 뒷이야기는 없어. 다큐멘터리에서도 사건이 해결된 이후에 서울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만 있고.

효림 : 맞아. 그 이후에 취재팀이 더 찾아보려고 했지만 마을에 연락이 닿는 사람이 없었고 본인도 범인에게 스토킹에 성추행을 당한 입장이라 숨어버리는 게 당연하다고 다들 생각했지. 그래서 과하게 찾아다니지 않은 것도 있고 말이지.

진석 : 그 여자에 대해서 새롭게 알아낸 게 있는 거야?

효림 : 여관 주인 아들 말이 당시 연희가 썼던 물건들이 여관방에 있대. 그래서 가보니까 비키니장 안에 물건이 있더라고. 보니까 책이랑 사진, 화장품 같은 게 보따리에 묶여 있더라. 당시 주민들은 이 마을을 인생에 굴욕이라 생각하고 나 내팽개쳐두고 갔다고 생각했대. 여관 주인이 그래도 사진은 소중하니 다시 찾으러 올 수 있다고 잘 보관해 두고 기자한테는 보여주지 않았다고 하더라. 그리고 장롱 안에서 이걸 발견했어.

 

효림이가 주머니에서 꺼낸 물건은 머리핀이다.

 

노트북에 저장된 사진과 비교해 보니 35년 전 결정적인 증거였던 ‘그 머리핀’과 같은 모양이다.

 

당시 경찰은 머리핀이 연희의 것이란 걸 확인했다.

 

연희가 잃어버린 반쪽이라며 이 머리핀을 내밀었다.

 

효림 : 이 머리핀은 연희가 사라진 후에 방을 청소하다 발견했대. 화장대 아래 틈새에 들어가 있었다고 하더라. 당시 마을 주민들이 송별회를 열어준다고 했는데 연희가 난색을 표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밤중에 몰래 도망 갔다고 생각했다는데 그러기에는 수상한 점이 많아.

진석 : 먼저 보따리부터. 남을 배려하는 성격이 아닌 사람이 굳이 청소하기 쉬우라고 보따리를 싸뒀다? 그것도 이 마을에 올 때 가져온 유일한 짐인 사진과 책들도 같이? 송별회가 아무리 싫었어도 짐은 가지고 갔을 거야. 다음으로 머리핀. 이 머리핀은 오세근을 잡은 핵심적인 증거야. 만약 고스란히 짐을 싸두고 떠날 생각이었다면 짐 안에 있어야지 바닥에 버려둬서 화장대 아래에 들어가게 하진 않았을 거야.

효림 : 그렇다면 세울 수 있는 가설은 하나네.

진석 : 연희는 마을을 떠난 게 아닌 실종된 거다.

효림 : 이런 어설픈 상황극이 먹힐 수 있었던 건 오세근 때문이었을 거야. 오세근에 대한 공포 때문에 연희가 빨리 마을을 떠나고 싶어 했다. 이렇게 생각했을 확률이 높으니까.

진석 : 포비아 때문에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했겠지. 경찰은 큰 사건이 끝난 후니까 실종이라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범인이 잡혔는데 또 사건이 발생했다 여기진 않았을 테니까.

효림 : 만약 연희가 스스로 떠난 게 아니라면...

진석 : 진범에게 당한 거야. 틀림없어.

 

방 안에는 침묵이 감돈다.

 

가능성에는 도달했지만 더 복잡한 수수께끼가 눈앞에 놓였다.

 

진범이 있다면 연희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현재까지 행방을 알 수 없는 거 보면 살인인 걸까.

 

아니면 마을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던 걸까.

 

위협이나 협박을 받았다면 왜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던 걸까.

 

단순히 친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이 마을은 유대가 끈끈하다.

 

그 안에 들어가길 거부했단 이유로 배척당했다 느낀 걸까.

 

머리핀을 바라보니 책 속에 문구가 떠오른다.

 

해가 질 때마다 절망을 토해냈다는 그 말이.

 

매일 아침이면 현장 근처를 향했다.

 

주변이란 주변은 모두 뒤졌다.

 

손톱이 닳아 없어지고 손가락에 생긴 흉터가 벌어져 피가 줄줄 흘러도 멈추지 않았다.

 

두 손이 다 사라진다고 해도 범인을 잡을 증거를 찾을 수 있다면 상관없다 생각했다.

 

아이들은 나를 도와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작은 체구의 아이들은 토굴이나 하수도에 들어갔다.

 

흙과 먼지로 온몸이 새까매질 때면 해는 모습을 감췄다.

 

아이들은 무서운 어둠을 따라 사라졌다.

 

촌장님과 영주 언니, 인준 오빠는 손전등을 들고 와 나를 지켜줬다.

 

내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묵묵히 그 곁을 지켰다.

 

그들의 배려에 보답하는 방법은 한 가지.

 

범인을 잡을 수 있는 증거를 찾는 거였다.

 

아주 작은 거라도 좋다.

 

누군가를 범인으로 의심할 수 있는 물건이 하나만 나온다면 난 그 사람을 평생 원망하며 살 수 있다.

 

해가 점점 저물어 가고 아이들이 하나 둘 숙소를 향하던 어느 날, 영주 언니를 비롯한 날 지켜주는 수호천사들이 손전등과 함께 나타나기 바로 전에 무언가 손끝에 닿았다.

 

감촉도 느껴지지 않는 굳어버린 손가락으로 들어 올린 그것은 머리핀이었다.

 

비가 오는 날에도 지워지지 않은 피가 살짝 남은 머리핀.

 

그 머리핀의 주인 때문에 영주 언니한테 연락을 받은 적 있다.

 

언니는 며칠 전 마을회관에서 스마트폰 사용법을 배웠다고 했다.

 

호기심에 유튜브에 내 이름을 쳤는데 영상이 나왔다고.

 

영주 : 뭐 책 읽어주는 영상이었는데 거기서 네 작품을 읽어주더라. 근데 나 내용 듣고 기가 막혔던 거 있지.

숙자 : 기가 막히다니, 뭐가?

영주 :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여주인공이 너무 흡사한 거야. 그랬더니 결말까지 어쩜 그리 똑같은지. 숙자야. 이제 그만 빠져나와. 네가 아직도 과거에 사는 거 보면 내가 다 답답해.

숙자 : 그건 그냥 소설일 뿐이야. 언니가 뭘 상상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거 아냐.

영주 : 아니긴 뭘. 그 이야기 주인공, 연희잖아. 외모 묘사한 거만 들어도 딱 알겠는데. 그 사건이 너한테 잊기 힘든 일이라는 거 잘 알아. 그래서 네가 빨리 빠져나왔으면 하고. 계속 그 안에서 살 수는 없잖아.

숙자 : 잊을 수 없어. 아니, 잊어서는 안 되지. 그 사람이 사형선고를 받았다면 모를까 멀쩡히 살아 있잖아.

영주 : 그렇다고 영원히 그 악몽 속에서 살 거니?

숙자 : 언니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잘 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 그리고 작품 속 주인공이 연희였을 뿐이야. 내 작품의 또 다른 재구성이라고. 다른 작가들도 다 그래요. 하나 작품이 성공하면 그거로 영화며 연극이며 다시 쓴다니까. 요즘 여성이 주인공인 장르소설이 인기라서 쓴 거뿐이니까 너무 의미 부여하지 마.

영주 : 의미 부여하는 게 아냐. 눈에 빤히 보이니까 그러지. 네 말대로 재구성이라면 범인을 잡는 거로 끝냈겠지. 나도 그런 줄 알았어. 주인공만 연희로 바꾼 거구나 했다고. 그런데 왜 연희가 자살하는 거로 끝낸 거야. 숙자 네 속마음을 말해볼까? 넌 연희한테 감정을 이입한 거야. 그놈이 연희를 괴롭혔던 거처럼 네가 괴롭힘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거라고. 그 인간이 합당한 죗값을 치르지 않게 되었으니까 널 죽인 거잖아.

숙자 : 그만해, 언니. 내가 쓴 건 소설이야. 다 상상이라고. 그 다방 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르잖아. 내가 그 뒤에 이야기를 지어 쓴 거라니까. 그게 다야. 그러니까 언니, 그만해. 언니는 책도 안 읽잖아. 그러면서 무슨 대단한 해석이라도 발견해낸 거처럼 지적질이야, 지적 질은.

영주 : 난 그저 네가 안타깝게 느껴져서 그래. 이제 다 끝났잖아. 그놈은 붙잡혔고 살인사건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아. 그런데 너 혼자 계속해서 그때의 일을 되감기 하고 또 되감기 하고 있어. 같은 영화를 몇 번씩 보면서 집착을 반복한다고. 이제 그만 다 보내줘. 네 남편도, 동생도 이제 그만...

숙자 : 아니, 못 보내. 나한테는 그이가 전부였어. 물꽃 마을에서 유일하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사람이었다고. 남편 때문에 내가 동생을 그 마을로 끌어들였어. 내가 아니었으면, 나만 아니었으면 동생은 죽지 않았어. 언니 그거 알아? 나, 그이가 죽고 얼마나 불안했는지. 마을에서 일하라고 부르진 않을까, 다시 혼사라도 가라고 강요하진 않을까 매일 마음을 졸이면서 살았어. 그때 내 마음은 분노와 불안만 존재했다고.

영주 : 숙자 너, 말이 너무 심하잖아. 마을 어른분들이 그럴 분들이었니? 그분들이 얼마나 널 챙겨줬는데. 촌장님이 너 걱정된다고 매일 손전등 들고 옆에 계신 거 기억 안 나? 동일이, 나랑 마을 언니들이 다 업어 키웠어. 네가 소리 지르면서 울 때마다 나랑 민혁 오빠가 곁에 있어줬고.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숙자 : 난 달랐잖아! 할 줄 아는 일 하나 없고 남편도 남동생도 다 죽어버렸어. 마을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얼굴은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싫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연희가 그랬잖아. 누구도 그 애한테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았어.

영주 : 그건 연희가 먼저 차갑게...

숙자 : 아니, 그 애가 다방에서 일한다는 걸 알고 먼저 가볍게 여겼잖아. 여관에서 지낸다고 곧 떠날 사람 같다고 다들 막 대했잖아. 누가 그런 좁고 더러운 집에서 지내고 싶어 해. 나도 싫었어. 나도 싫었다고. 근데 그 애는 더 외로웠잖아. 그런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 그때도 연희한테...

영주 : 그만! 그만해, 숙자야. 내가 잘못했다. 언니가 주제넘게 말해서 미안해. 그러니까 우리 그만하자. 그만 화 풀어. 나도 이 마을 사람들도 널 사랑해. 그러니까 제발 그만해.

 

언니는 그 여자한테 어떤 감정을 품고 있었을까.

 

묻고 싶은 말들이 많았다.

 

언젠가 한 번은 언니를 만나 손을 잡고 밤새 이야기를 나눌 줄 알았다.

 

서로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따뜻한 말만 피어나는 순간을 상상했다.

 

시간은 계획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영주 언니는 오늘 장례를 치르고 흙으로 돌아간다.

김준모
씨네리와인드 기획취재부
rlqpsfkxm@cinerewin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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