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걸헤이트’이지만 여적여가 아니다 ②

Girl Hate (おんなのこきらい,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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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령
기사입력 2019-05-04 [13:30]

▲ Girl Hate (おんなのこきらい, 2015)     © SPOTTED PRODUCTIONS

 

  "영화 제목 자체가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인데 여적여 영화가 아니라는 게 말이 돼?"

 영화의 제목은 '걸 헤이트', 원제를 직역하면 '여자 아이 싫어(おんなのこきらい)′다. 여적여 사회에서 시달린 미녀가 여자 아이라는 존재 자체에 진절머리가 난 걸 표현한 제목으로 보일 수도 있다.

 

 여기서 잠깐, 혹시 '여자 아이'라는 단어가 거슬리지 않는가? 키리코는 회사원이며 결코 '아이'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는 '여자'가 아닌 '여자 아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몇 년 전 일본에서는 유명 화장품 회사의 광고가 성차별 논란에 휩싸였는데, 해당 광고에서도 이 단어가 쓰였다.

 "(25살의 생일을 맞은 여자를 향해서) 오늘부터 너는 '여자 아이'가 아니야. 더 이상 남자들이 응석을 받아주지도 않지. 귀여움이라는 무기는 더 이상 너에게 없어."

 광고에서 보면 '여자 아이'는 생물학적 연령이 아이인 여자를 가리키는 게 아닌, 남자들에게 귀염을 받는 존재를 나타낸다는 걸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우리의 주인공 키리코를 표현하는 단어다.

 

 그렇다면 영화 제목에서 '여자 아이'는 어떤 의미로 쓰인 걸까. 본 기사에서는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여자 아이를 계몽하는 개념남

▲ (좌) 다카야마, (우) 키리코     © SPOTTED PRODUCTIONS

 

 기존의 여적여 영화에서 미녀는 남들에게 잘 보이는 거에만 관심이 있는, 속은 텅텅 빈 미성숙한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던 어느 날 어른스러운 남자 주인공이 짠하고 나타나서 내면적 성숙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키리코에게는 업무 미팅에서 만난 다카야마가 그러한 존재다. 키리코는 액세서리 수공업자인 다카야마에게 자신이 고안한 귀여운 디자인을 보여준다. 키리코는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고자 온갖 아양을 부리지만, 다른 남자들과 달리 다카야마의 반응은 싸늘하다.

 "귀여운 건 불쌍하잖아요. ('귀엽다(かわいい)'와 '불쌍하다(かわいそう)'의 발음이 유사한 걸 이용한 언어유희. 이처럼 이 영화에서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도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디자인이 귀엽게 보이는 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까 소재만의 특성이나 본모습이 가려져 있어요."

 키리코는 이 말이 자신을 향한 말임을 간파하고는 불쾌감을 느낀다. 여느 로맨스 영화가 그러하듯 처음에는 둘은 티격태격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카야마만은 자신의 본모습을 똑바로 봐준다는 사실에 감명받은 키리코는 내적 가치관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한다.

 

 기존의 영화의 클리셰대로라면 키리코는 성숙한 존재로 성장하고 남자 주인공과 이어져야 했다. '여적여 사회의 여성들은 남들의 시선만 신경 쓰는 한심한 존재이며, 거기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자신을 사랑해라'라는 가르침을 받았으니 '진정한 사랑'이라는 보상이 주어져야 했다.

 어린 알바생에게 사랑하던 유토를 빼앗긴 키리코를 다카야마가 상냥하게 달래주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둘이 이어질 거라고 기대했지만 영화는 관객의 예상을 배반한다. 키리코는 다카야마에게 속내를 여과 없이 털어놓고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주지만, 다카야마는 키리코의 사랑을 끝내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알 수 있는 건 여자의 성장의 대가는 결코 남자의 사랑이 아니라는 거다. 성장의 결과물은 성숙해진 자기 자신일 뿐이다.

 

'여자 아이'에서 '여자'가 되는 순간

▲ '여자 아이' 시절, 키리코는 유토를 노리는 어린 알바생을 경계했다     © SPOTTED PRODUCTIONS


 다카야마가 키리코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았던 장면을 살펴보면 더욱더 흥미로운 점이 보인다.

 

 키리코는 휴일에 다카야마의 집에 불쑥 찾아가서 같이 전골 요리를 해 먹자고 한다. 그런데 집에서는 이미 다카야마의 여자친구가 카레를 준비하고 있었다. 남자친구의 집에 낯선 여자가 갑자기 찾아온 상황에서도 여자친구는 불쾌한 내색 없이 키리코를 반겨준다.

 "전골 재료를 사 오셨네요. 그러면 카레 전골을 만들어요."

 여자친구는 전골 국물에 카레를 녹인다. 영화 첫 장면에서 키리코는 혼자서 디저트를 먹으면서 '디저트의 귀여움이 내 몸속에서 녹아 버려야 한다'라고 말했었는데, 그에 반해 여자친구는 여러 사람이 함께 먹을 수 있는 요리 속에 키리코의 아픈 마음을 녹여낸다.

 

 자신에게는 없는 성숙함이 다카야마의 여자친구에게는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키리코는 밥을 먹다가 밖으로 뛰쳐나간다. 여자친구는 다카야마에게 키리코를 쫓아가서 달래주라고 한다. 다카야마가 왜 그렇게 너그럽냐고 물으니 여자친구는 이렇게 대답한다.

 "'여자(おんな)'니까."

 그전까지 작품에서는 여성을 지칭하는 말로 '여자 아이'가 쓰였다. 그렇지만 이 상황에서는 '여자'라는 단어가 단호한 어조로 쓰인다.

 

 여자 아이였던 키리코는 여적여 사회에서 살아왔다. 오랫동안 사랑했던 유토에게 접근하는 알바생을 언제나 경계했으며 그녀에게서 유토를 빼앗기 위해서 발악했다. 그렇지만 여자친구는 다카야마에게 마음을 품은 키리코를 경계하기는커녕 그녀의 마음을 헤아린다.

 

 사회가 규정한 '여자 아이'는 남자에게 귀염을 받아야 존재이며 그렇지 못하게 되면 여적여를 한다고 여겨져 있다. 반면 다카야마의 여자친구와 같은 '여자'는 남을 질투하기 보다는 서로를 이해하고 도우려고 한다. 질투는 남녀를 떠나서 인간이라면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니 그걸로 정신적 성숙함을 논할 수는 없지만, 이 장면은 여성을 사회에서 통용되는 젠더 프레임에서 탈피한 존재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키리코는 자신을 찾아와준 유토에게 매달리지만 유토는 미안하다면서 여자친구가 있는 곳으로 다시 가 버린다. 키리코는 아이들이 노는 모래밭에서 아이처럼 흐느낀다. 그곳에서 키리코의 '아이'로서의 삶은 끝난다.

 

 여자 아이는 다양해, 생각도 다양하지

▲ Girl hate (おんなのこきらい, 2015)     © SPOTTED PRODUCTIONS


 영화의 마지막 주제가의 가사에서는 '여자 아이는 다양해, 생각도 다양해'라는 후렴구가 반복된다. 여성이라는 존재를 하나의 젠더 프레임으로 해석하지 말라는 작품의 의도를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필자는 영화 제목 '여자 아이 싫어'의 '여자 아이'를 키리코를 질투하는 회사 동료들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는 '여자 아이'가 지칭하는 건 여적여 여성들이 아닌 '사회에서 강요하는 여자 아이 프레임'이라는 걸 깨달았다. 영화는 젠더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키리코를 그리고자 했던 거다.

 

 이후에 키리코가 여자 아이에서 여자, 아니 한 명의 사람으로서 성장하는 과정도 흥미로운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나머지는 영화 본편을 통해 직접 확인해보시길 바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영화는 독립 영화인데다가 러닝 타임도 한 시간 정도라 국내에서 정식으로 개봉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여성을 주체적으로 그려낸 영화가 한국 관객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필자는 이 기사를 작성하게 되었다.

 

[씨네리와인드 김재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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